[천자칼럼] 800살 은행나무와 AI 소방관

입력 2024-01-26 18:01   수정 2024-01-27 00:44

‘쉬리’로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은 1996년 개봉한 ‘은행나무 침대’다. “한국에서 이런 영화가 성공하겠어”라는 우려를 “한국에도 이런 영화가”라는 찬사로 바꾼 판타지 영화다. 천 년 전,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이 한 쌍의 은행나무가 된다. 하지만 그중 한 그루는 벼락을 맞아 불탄다. 긴 세월이 지나 사람으로 환생한 그가 그녀의 영혼이 깃든 은행나무 침대와 만나는 이야기다. 그런데 왜 은행나무 침대였을까. 천 년의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장수하는 은행나무 외에는 대안이 없었을 듯하다.

나무는 다 오래 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. 자작나무는 수령(樹齡)이 50년 안팎이라고 하니 사람 수명보다 짧다. 세계 최고령 나무로 알려진 것은 올해로 4856살이 된 미국 캘리포니아의 브리슬콘 소나무 ‘무드셀라’다. 무드셀라는 969세까지 살았다는 성경 속 인물이다. 몇 년 전엔 칠레 국립공원의 알레르세라는 나무가 5500살에 가깝다는 한 연구진의 추정도 나왔다.

국내에선 울릉도 도동의 향나무가 200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공식적으로는 강원 정선 두위봉의 주목이 1400살로 최고령이다. 경기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도 1100살이 넘었다. 이 밖에 경북 봉화의 느티나무, 경남 김해의 이팝나무, 제주 애월의 팽나무가 수령 600~1000년을 자랑한다.

천연기념물인 강원 원주 반계리의 800살 넘은 은행나무가 ‘인공지능(AI) 소방관’의 보살핌을 받게 됐다. 원주시가 2억원을 들여 ‘자율형 화재 초동 진압 설비’를 설치한다고 한다. 낙뢰 등으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스스로 불이 난 곳을 찾아 진화하는 시스템이다.

수많은 외침(外侵)과 식민지배 시대의 수탈, 6·25 전란을 한국의 나무들도 고스란히 겪었다. 타고난 수명만큼도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텐데 꿋꿋하게 버텨준 ‘고령의 나무들’이 참 고맙다. 경복궁 ‘낙서 테러’ 등으로 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커진 요즘이다. 문화유산 못지않게 자연유산도 소중하다. 다른 지역의 귀중한 나무들도 반계리 은행나무 같은 특별한 경호를 받았으면 좋겠다.

김정태 논설위원 inue@hankyung.com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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